그리고 마침내 섬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아까까지의 생각을 싹 접어버렸죠. 구름 사이사이로 햇빛이 비치면서 해안 절벽이 은빛으로 반짝였거든요.

 

우편 수송선이 덜컹거리며 항구로 접근하면서 세인트피터포트가 점차 모습을 드러냈어요. 꼭대기에 우뚝 솟은 교회가 마치 케이크 장식 같더라고요. 심장이 뛰기 시작했죠. 눈앞의 풍경이 감동스러워서라고 속으로 다독였지만 그런다고 본심이 숨겨지나요. 새로이 알게 된 사람들, 어쩌면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전부 손꼽아 기다리고 있잖아요. 바로 나를 말이에요! 그리고 나는, 더는 편지나 기사 뒤에 숨은 존재가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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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에 들어서자 기다리는 사람들 얼굴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이제 돌아갈 길은 없다는 걸 알았죠. 그간 주고받은 편지로 난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어요. 요상한 모자를 쓰고 자주색 숄에 반짝이는 브로치를 단 사람이 이솔라였죠. 엉뚱한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함박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단박에 사랑하게 되었어요. 이솔라 옆에는 주름진 얼굴의 남자와 사방팔방 두리번대는 소년이 서 있었는데, 에번과 그의 손자 엘리였죠. 내가 손을 흔들어주었더니 엘리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할아버지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어요. 나는 갑자기 쑥스러워져 손을 내렸고, 이내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 틈에 휩쓸려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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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열면 바로 앞에 들꽃 가득한 들판이 펼쳐진단다. 가능한 한 빨리 절벽으로 달려갈 거야. 바위 위에 누워 진주처럼 빛나는 오후의 하늘을 감상할래. 은은한 풀 향기를 맡으면서, 마컴 V. 레이놀즈라는 사람은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는 걸로 하겠어.

방금 돌아왔어. 몇 시간이나 지났네. 석양이 구름 가장자리에 이글거리는 금테를 둘렀고 바다가 절벽 아래 부딪히며 신음을 내고 있어. 마컴 레이놀즈? 그게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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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실의 가장 큰 창문 곁으로 책상을 밀어놨어요. 이렇게 해놓으니까 수시로 밖에 나가 절벽 위를 산책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는 게 5분만 흘러도 바다와 구름 모양이 달라져요. 그러니까 집 안에 있다가 뭔가 근사한 광경을 놓칠까 봐 노심초사라니까요. 오늘 아침 잠에서 깼을 때는 바다 위에 금화를 뿌려놓은 듯 반짝이더니, 지금은 온통 레몬색 장막으로 덮인 것 같네요. 작가는 내륙 깊숙이 아니면 도시의 쓰레기 하치장 바로 옆에 살아야 해요. 이도 저도 아니면 나보다 훨씬 독하게 맘을 먹든가. 그래야 책상 앞에 붙어서 일을 해치울 수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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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섬은 다채로운 매력이 있는데, 하나같이 아주 아름다워요. 들판, 숲, 산울타리, 골짜기, 중세 유럽 귀족의 영지, 고인돌, 천연의 절벽, 마녀 골목, 튜더 양식의 헛간, 노르망디풍 돌집…… 새로운 장소와 건물을 만날 때마다 거기에 얽힌 (무법의) 역사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메리 앤 셰퍼,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25. 10. 4. 2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