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민을 위한 하나의 시놉시스
(실체와 속성의 관점으로)
1.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사물
- 악기 테레민
<1920년대 러시아의 음향물리학자 테르민이라는 사람이 만들어낸 전자 음향 악기. 그의 이름을 따서 테레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겉으로 보기엔 작은 상자처럼 보인다. 이 악기는 상자 속의 공명을 통해 수직의 공간(허공)으로 음열의 파동을 일으키고 그 공간 속으로 두 손을 휘저으며 연주하는 악기다. 마치 겉에서 보면 마임이나 주술을 걸고 있는 듯하다. 몽환적이고 서글픈 음색을 띤다. 다른 악기와는 달리 이 악기는 인간의 어떤 신체 접속도 기계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허공의 질서로 손이 들어가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며 음악을 형성한다. 이 악기는 매우 연주법이 어렵고 난해해서 현재 전 세계에 30명가량만이 연주를 할 수 있다고 전해진다. 현재 생명체처럼 거의 멸종상태고 이 악기의 사운드를 개량해서 오늘날의 신시사이저가 되기도 했다. 영화상에서 히치콕이 한 번 원곡이 아닌 변주를 통해 사용한 적이 있다. 훗날 이 악기를 만든 테르민은 음감에 대한 뛰어난 능력 때문에 러시아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첩보국에서 평생 도청 업무를 맡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말년이 되어 갑자기 뉴욕의 도시 한가운데 나타나게 되는데 실어증과 심막폐쇄증의 사인으로 곧 죽고 만다. 이 극에서 이 악기는 마치 생명을 가진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다. (위 사실은 실제와 다름없음.)>
2. 인물
안인희 : (남) 30.
직업 : 피아노 조율사.
그는 음악이면서 동시에 사람인 존재다. 전생에 음악이었지만 현세에 사람으로 다시 환생한다. 과거에 러시아 작곡가 아낙사고라스가 작곡했던 음악(테레민)이다.
따라서 이 극에서 음악으로 환생한 인희는 자아가 음악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성스런 : (여) 26.
직업 : 피아노 연주자.
테레민을 만든 러시아 작곡가 아낙사고라스가 사랑했던 여자. 전생에도, 현세에도 피아노 연주자로 살아간다. 전생은 소냐였다. (동일인물.)
아낙사고라스 : (남) 48.
직업 : 전직 KGB 출신 작곡가.
부인의 죽음을 계기로 KGB 활동을 그만두고 작곡에 몰두한다. 자신의 제자이면서 피아노 연주자인 소냐를 사랑한 인물이자 인희의 전생이었던 음악을 작곡한 인물. 인희라는 자신의 음악을 깨우기 위해 자신은 현재에 인희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으로 환생한다. 진지하고 올곧으며 차분한 성격이다.
성애런 : (여) 29.
청각 장애인. 스런의 언니.
음악의 소리를 듣지는 못하지만 음악의 영혼을 들을 수 있는 인물. 이 극에서 그녀는 음악이 흘러나오면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다. 그녀의 눈은 음이 가지고 있는 음역을 바라보는 것처럼 하얗다. 어느 날 인희의 영혼이 음악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아보게 된다.
3. 작의(作意)와 극의 주요 모티프
- 인연에 대한 새로운 실체와 속성
<실체>
전생과 환생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일테면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사람이 어떤 생물로 태어난다는 자연발생적 환생론이 아니라 사람이 음악으로 태어날 수 있고 음악이 사람으로 다시 환생할 수 있다는. 일종의 중세의 후생설이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모든 것을 신에 대한 목적론적으로.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의인화된 편견을 버린다면 '실체'가 보인다. 칸트는 인간의 정신은 형이상학적인 소질을 타고났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성은 초월에 대한 경험 근거를 가지려고 한다고 보았다. 그 욕구를 그는 다만 오성과 확연히 분리하고 싶어할 뿐 자신의 생에선 다루고 싶어하지 않았다. 형이상학은 그의 거주지였지만 그가 이성으로 세운 건축술은 테레민을 놓쳤다. 이 극에서 나는 그것을 쓴다.
<속성>
이 극에서 작곡가 아낙사고라스는 사랑하는 한 여인을 위해 자신이 만들었떤 음악을 사람으로 환생하게 하여 이루지 못한 사랑을 후생에 이루려 한다. 자신의 자아를 음악에 부여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칸트의 후생 체계를 환유한다.)*
즉 자신의 음악을 영원 속에 봉인하고 주술을 걸어 후일 자신의 음악으로 하여금 과거에 사랑했던 여자를 다시 사랑하게 한다.
4. 내러티브
- 프롤로그 <과거>
- 자궁을 다녀온 손
전운이 감도는 황량한 모스크바 목조 가옥,
구름 속에 스며 있던 바람이 흘러나온다 바람 속에 창이 생긴다
방 안에서 아낙사고라스가 테레민을 연주하고 있다
그의 눈이 구름의 속처럼 어둡다
테레민의 질서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는 어두운 손이 늙기 시작한다.
공간 속을 다녀올 때마다 손은 점점 말라간다
뼈를 쥐고 있던 살들이 주름지고 살 안에 스며 있던 뼈가 하얗게 드러난다
음악을 남겨놓고 먼 곳에 다녀온 손이 주술을 끝낸 듯 푸른 연기에 싸여 있다
<현재>
음악 속의 음악 인희는 스런을 만나 인연이 되고 사랑을 하게 된다. 피아노 조율사와 피아노 연주자 사이로 만나는 둘. 인희는 자신이 지금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음악 속의 음악 같은, 무언가 알 수 없는 다른 음악(자신의 전생인 테레민)이 떠오르지만 인희는 그것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음악이 흘러나올 때마다 마치 하나의 음악이 다른 하나의 음악을 부르는 듯하다. 인희와 스런의 사랑은 점점 깊어가지만 둘 사이를 음악(아낙사고라스)은 질투가 흐르듯 바라본다. 인희와 스런과 음악 셋 사이에 알 수 없는 묘한 삼각관계가 점점 음악의 분위기와 함께 형성되고 스런의 언니 애런만이 그 서글픈 느낌을 감지하게 되는데……
어느 날 애런(스런의 언니)은 우연히 인희와 함께 있던 중 인희에게서 떠오르던 알 수 없는 음악의 선율을 흥얼거린다. 그리고 인희는 그 음악이 러시아에서 작곡된 하나의 음악이란 걸 알게 되고 일과 함께 모스크바로 떠난다. 모스크바의 한 허름한 저택에서 기억 속에서만 맴돌던 실제 음악을 듣게 되는 인희. 전생의 조각을 하나씩 되찾아가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부터는 서글프게 스런을 대하게 된다. 이때부터 극은 과거(러시아)와 현재(서울)가 서서히 교차되다가 과거(러시아)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다시 과거>
열정 전직 KGB 출신의 음악가인 아낙사고라스는 첩보 활동으로 동구 유럽에 가 있던 중 부인의 임종을 듣게 된다. 부인의 죽음에 모든 것에 회의를 느낀 그, 일을 그만두고 한 저택에 숨어들어 음악에만 전념한다. 그가 작곡한 피아노 소품들을 연주하는 제자인 피아니스트 소냐. 부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소냐에 대한 열정을 감추고 있던 아낙사고라스는 서서히 소냐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소냐는 아낙사고라스를 사랑하지 않고 다만 그를 존경할 뿐이다.
<현재> 광기
인희는 전생의 비밀을 스런에게 들려준다. 스런과 함께 과거에 자신이었던 음악을 듣는 인희, 그리고 이들 주변을 떠도는 듯한 음악이 된 아낙사고라스. 전혀 만져본 적도 없던 테레민을 연주하게 되는 스런. 그러나 아낙사고라스의 광기가 가진 무서운 사랑을 알고 있는 스런의 언니 애런은 음악의 영혼들로부터 이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무서운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다시 과거, 처음으로> 주술
황량한 모스크바 목조 가옥. 창 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
아낙사고라스는 지친 듯 낡은 소파에 앉아 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냐. 구름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새로운 음악을 작곡했소." 그는 평상시처럼 피아노로 가지 않고 테레민 위에 손을 댄다.
"당신을 위해." 이윽고 아낙사고라스는 테레민의 음역 속으로 서서히 손을 집어넣는다.
늙은 손과 젊은 손이 시간의 질서를 휘저으며 흐른다.
음악은 소냐의 몸으로 다가가 그녀의 몸 안에 공간을 만들기 시작한다. 마치 아낙사고라스는 그 공간에 테마처럼 누워 있는 듯하다.
눈물을 흘리는 소냐. "왜 그러세요."
"우리가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요?"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음악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연다.
"다음 세상에서 너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거라."
<에필로그> 연민
이 부분은 피코 델라 만돌라(1463~1494)의 문서,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의 한 구절을 빌려서 상상해보고자 한다.
아담아 우리는 너에게 정해진 자리나 독특한 겉모습이나 유별난 재주를 주지 않았다 너는 네 자리와 겉모습과 재주를 네가 소원하고 판단하는 대로 선택하여야 한다 너는 어떤 제한을 받지 않을뿐더러 너의 본성은 너의 뜻에 맡겨두었다 네 자신이 그것을 정해야 한다 나는 너를 세계의 중앙에 두나니 네 주변을 둘러볼 때 세계에 무엇이 있는가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너를 하늘의 존재나 땅의 존재나 죽을 존재나 죽지 않을 존재로 만들지 않았다 너는 네 스스로 선택한 모습대로 너 자신을 만들어가는 조형자요 창조주가 되는 자유와 영예를 누릴 것이다 너는 네 자신을 비천하게 만들어 짐승이 될 수도 있고 네가 원한다면 더 고귀한 영적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그 생에도 내가 이루지 못한 사랑이 있을 테니. 내가 음악이 되어 너를 깨울 것이다."
*후생체계 : (이성만이 '조직'과 '체계'의 원리이며 주체이므로 현상계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지만 가상계는 사유할 수는 있되 우리가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대상의 형식적 근거일 뿐이지 질료로서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질료로서의 근거는 신의 몫이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은 후생 체계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체계의 가능성과 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나는 관념론 시험 답안지에 썼지만 칸트가 말한 시간의 개념을 떠올려보자. 시간은 경험에 근거해서만 작용할 수 있다. 즉 내가 경험하지 않을 때 시간이라는 것은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쩐지 이 말은 시적이다. 왜냐면 스피노자의 유일 실체 개념이나 그것에서 운동과 이율배반(안토노미)을 본 헤겔의 칸트를 넘고자 했던 시간의 의지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간이 이성의 경험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끝까지 부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극은 그 지점에 대한 나의 이율배반이다.
김경주, 테레민을 위한 하나의 시놉시스